성장주의 대가 - 피터린치가 종목 고르는 스토리 원칙 12( 12-1 연속 진행)
종목 선정은요
내 주변에서 찾아셔야 됩니다.
주변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종목을 사서 돈 벌었다고
해서
나도 그 종목을 사서
돈을 번다는 확률은 없습니다.
가령 내가
컴퓨터에 관심이 있다고 쳐봐요
그럼
컴퓨터에 관련된 종목이
유선 / 무선 / 데이터센터 / 컴퓨터 부품
등등의 영역이 있을 거잖아요.
그럼 컴퓨터 관련된 종목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거
잖아요.
그리고 그 분야들이 어떻게 움직있는지
돈은 어떻게 벌리는지
알잖아요.
종목은 이렇게 선택해야 됩니다.
내가 관심없고 내가 모르는 분야의
종목은 아예 손을 대지 마세요.
그러다가
주식 종목에서 박살 나는 겁니다.
피터린치 수익내는 주석
마젤란펀드 운용 초기에 내가 좋은
수익률을 거뒀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78년에 내가 가장 선호했던
10개 주식의 PER는 4배에서 6배 사이였고
1979년에는 3배에서 5배 사이였다.
주가가 순익의 3-6배에 불과한
주식에 투자해 손해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시 내가 선호했던 주식은 앞에서 이미 설명
설명한 소매업체와 은행 등을 포함안
중소형 기업
이른바 2등 주식이었다.
1970년대 말에 펀드매니저와 주식 전문가들은
2등주는 이미 전성기를 누릴 만큼 누렸기
때문에 이제는 대형 블루칩에 투자할 때라고
나에게 조언했다.
나는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서
무척 다행이라 생각한다.
대형 블루칩에는 흥분할 만한 요소가 없다.
블루칩은 2등주에 비해 주가가 배가량
비쌌다.
작은 것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돈도 벌어준다.
마젤란펀드 초기
경험으로 보는 주식 투자 방법론
최근에 나는 책상에서 기업소개서를 치우고
마젤란펀드에 있을 때 주주들에게 보낸
운용보고서를 모아놓은 서류철를 꺼냈다.
13년간의 마제란펀드를 어떻게 운용했는지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13년간의 펀드 운용 내역을 정리하면서 피델리티의
컴퓨터 전문가 가이 서룬돌로,
필 테이어, 자크 퍼롤드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바크 퍼롤드는 내가 펀드를 운용하면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종목과 가장 많은 손실을
입은 종목들을 뽑아내 출력해줬다.
이 목록은 기대 이상으로 유익했으며
어떤 결과에 대해선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마젤란펀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소형 성장주에 투자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과 크게 달랐다.
여기에 공개하는 내 13년간 펀드 운용 내역이
나의 실수로부터 무엇인가 배우기를 원하는,
또는
내가 투자한 종목 중에 어떤 것이 효과가
있었고 어떤 것은 효과가 없었는지 궁금해하는
다른 펀드매니저들과 개인 투자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정치인들이 회고록을 쓰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마젤란펀드를 운용했던 13년 세월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뉘 3장에 걸쳐 소개했다.
주식 투자자로서의 나의 인생이
뭔가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단지 설명하기 편리하기에 마젤란펀드 운용 시기를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이다.
피델리티는 상장회사가 아니다.
만약 피델리티가 상장회사였다면 당연히
사람들에게 피델리티 주식을 사라고 권했을 것이다.
나는 펀드에 투자하려는 돈이 매일 피델리티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과 새로운 펀드가 만들어져
출시되는 것을 지접 목격했다.
또
처음에는 창업자 애드워드 존슨에 의해,
그 다음에는 그의 아들 네드에 의해
피들리티가 얼마나 훌륭하게 경영되고
있는지도 직접 체험했다.
마젤란펀드의 전신은 1963년에 네드 존슨이
만든 피델리티 인어내셜널 펀드이다.
이 펀드는 해외펀드로 출범했지만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해외투자에 대한
강력한 세제 정책을 시행하는 바람에
해외 주식를 팔고 국내 주식을 사야 했다.
피델리티 인터내셜널펀드는 1965년 3월 31일
마젤란펀드로 이르을 바꾸기 전까지 2년간
명목상으로는 해외 펀드였지만
실제로는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국내펀드였다.
당시 마젤란펀드가 가장 많이 투자한 주식은
크라이슬러였다.
크라이슬러는 20년 후 내가 마제란펀드을
운용할 때도 파산위기에 벗어나면서
펀드 내 투자 비중이 가장 높았다.
크라이슬러는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기업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마젤란펀드가 출시됐을 때 나는 보스턴대학 학생으로
공부하며 주말에는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는 모든 사람들이 펀드에 투자하기를 원할
정도로 대대적으로 펀드 붐이 불 때였다.
펀드 붐은 가진 돈이 별로 없는 과부였던 내
어머니에게조차 영향을 미쳤다.
아머니는 교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부업으ㅗ
펀드를 펀드 판매사원의 설득에 넘어가
피델리티 캐피털펀드에 가입했다.
어머니는 동양의 지혜를 믿었기 때문에
중국 사람이 그 펀드를 운용한다는 사실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그 중국인은 게리 차이였다.
그는 피델리티 트랜드펀드를 운용하던
네드 존슨과 더불어 당시 피델리티의
독보적인 펀드매니저였다.
어머니는 펀드 영업사원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중국인이 피델리티 캐피털펀드를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당시에는 수많은 펀드 판매사원들이
전국 곳곳을 돌면서 펀드를 팔았다.
대다수는 수많은 펀드가 부업이었다.
이들은 진공청소기 외판원,
백과사전 외판원,
보험 판매원,
공동묘역 판매원 등과
마찬가지로 각 가정을 방문해 펀드를 팔았다.
어머니는 가족의 풍요로운 미래을 위해
피델리티 캐피털펀드에 매달 200달러씩
투자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그 혜택을 누리지 못했지만
피델리티 캐피털펀드는 S&P500지수를
뛰어넘는 수익률롤 1950년대에 세 배로
뛰어쏘 1960년대
첫 6년간은 다시 두 배로 급등했다.
1980년대에 주식시장이 흥분되는 상승세를
지속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주식시장은
매우 변덕스럽다.
몇 번의 조정이 별 다른 이유 없이 길게 이어지면
잡지에서 주식 투자에 대한 기사가 사라지고
각종 파티에서는 주식 투자를 자랑하는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투자자들의 인내심이 심각하게 시험당하며
헌신적인 주식 투자자들은 마치
철 지난 휴양지를 찾은 행락객처럼 외로움를
느끼기 시작한다.
내가 피델리티에 애널리스트로 입살할 당시에
주식시장은 이러한 침체 상태에 막 들어서기
시작하는 때였다.
주가는 고점을 친 뒤 1972-74년 급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972-74년 증시는 대공황으로 이어진
1929-32년 침체장 이후 최악이었다.
갑자기 아무도 펀드를 사러 하지 않았다.
펀드 투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면서
펀드 사업은 엉망이 됐다.
펀드 판매사원들의 실적도 곤두박질쳤다.
펀드 판매사원들은 펀드 붐이 일기 전에
팔았던 진공청소기나 자동차 광택제 등을
파는 영업사원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주식형 펀드에서 빠져나가
MMF와 채권형 펀드로 옮겨 갔다.
피델리티는 MMF와 채권형 펀등에서
이익를 거둬들여 주식형 펀드를
최소한 몇 개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겨우 생존한 주식형 펀드는
주식 투자에 아직 관심이 있는 극소수이
고객들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그 시절 주식 투자에 그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마치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처럼 찾기 힘들었다.
주식형 펀드들 사이에서 차이점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주식형 펀드가 주가 차익을 추구하는
일반 주식형 펀드라고 불렀다.
이러한 모호한 이름은 펀드매니지들에게
경기민감주, 유틸리티주, 성장주, 재료보유주
등 어떤 종류의 주식이든 살 수 있는 자유를 줬다.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 종류는 펀드마다 각기
달랐지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모두 똑같은
펀드로 느껴졌다.
1966년에 피델리티 마젤란펀드는 운용자산규모가
2000만 달러였지만 이후 주식시장이 침체되면서
환매가 꾸준히 이러져 1976년에는
600만 달러로 대폭 줄어들었다.
운용수수료가 보통 0.6%이므로
운용자산이 600만 달러면
연간 운용수익으로 3만 6000달러가
생긴다는 뜻이다.
3만 6000달러는 펀드매니저 한 사람의
1년 급여는 커녕 전기료를 포함한
관리비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한 돈이다.
피델리티는 1976년에 운용자산을 늘려
비용을 효율화하기 위해 600만 달러의
규모의 마젤란펀드와 고객 이탈로 위기에
처해 있던 1200만 달러 규모의 에식스펀드를
합병했다.
에식스펀드는 한때 자산규모가 1억 달러에
달했으나 약세장에서 운용실적이 악화되면서
5000만 달러이 이월견손금이 발생했다.
이 이월결손금이 에식스펀드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피델리티 경여진과 펀드매니저들은
1969년부터 1972년까지는 딕
하버먼과 네드 존슨이
1972년부터는 하버먼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마젤판펀드를 엑스펀드의
이월결손금으로 인해 두 펀드를
합한 뒤 발생하는
첫 5000만 달러의 자본이득에 대해서는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1977년 내가 마젤란펀들를 물러받았을 때
두 펀드는 하나로 합쳐져 운용자산이
1800만 달러였고
5000만 달러의 이월결손금이 있었다.
주식시장은 여전히 끔찍했고 초조함을
느낀 고객들이 빠르게 이탈하여
고객 수는 매우 적었으며
피델리티에서 마젤란펀드의 판매를
중단해 신규 고객을 끌어들일
방법도 없었다.
마젤란펀드가 판매를 재개해 고객의
자금을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4년이 지난 1981년부터였다.
언론은 마젤란펀드의 오랜 판매 중단
사태를 크게 오해했다.
이에 대해 널리 알려진 해석은
피델리티가 펀드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주식형 펀드의 수익률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 판매를 재개하는 현명한
전략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마젤라펀드는 오랫동안 신규 고객에게
판매하지 않으며 수익률이 좋아질 때까지
집중 관리하는,
이른바
인큐베이티 펀드로 여겨졌다.
이런 해석은 매우 그럴 듯하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피데릴티는 언제나 더 많은 고객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우리가 펀드 판매를 중단했던 이유는
펀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펀드산업이 침체되어 증권사들은
영업부서을 없애거나 축소시켰다.
결국 주식에 관심을 갖고 있는 극소수에게
펀드든 주식이든 팔 만한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마젤란펀드를 맡아 운용을 시작한 처음
4년간의 모호하고 불화실한 상황이
나에게는 저주였다기보다 오히여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주식시장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실수를 해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았고
덕분에 주식 매매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펀드매니저와 운동선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천천히 실력이 향상될 때 장기적으로 더
잘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마젤란펀드의 운용을 담당하기 전에
주로 섬유와 금속, 화학 업종을 분석하던
애널리스트였다.
전체 주식시장의 25% 가량의 기업만
익숙하고 나머지 기업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었던 터라 어떤 주식이든 살 수 있는
일반 주식형 펀드를 잘 운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어려웠다.
다만 나는 1974년부터 1977년까지
피델리티 기업분석 이사와
투자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던
경험 덕분에 애널리스트서
담당하지 않았던 다른 산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1975년에 보스턴에 있는 자선재단의
자산운용을 도왔는데 이것이 나의 첫번째
펀드 운용 경험이다.
바람둥이 카사노바가 수많은 여자들과의
연애일기를 소중하게 간직하듯 나는
기업 방문 내용을 기록한 일기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 일기를 보면 1977년 10월 12일에 나는
제너를 시네마를 방문했다.
하지만 제너럴 시네마가 나의 매수종목에
등장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기업에 별다른 인상을 받이 못했던 것 같다.
당시 이 주식은 1달러 미만으로 팔렸으나 지금은
30달러가 넘는다.
30배 수익률을 울릴 수 있는 기회을 놓친 것이다.
기업 방문일기를 훑어보면 이러한 기회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주식시장은 자비롭기 때문에 바로 멍터이구리에게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해준다.
마젤란펀드를 운용하기 시작한 첫 한달간
나는 전임 펀드매니저가 샀던 종목들을
내가 직접 선택한 종목들로 바꾸는 데
몰두하는 한편
끊임없는 환매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계속 주식을 팔아 현금을 마련해야 했다.
1977년 12월 말에 내가 마젤란펀드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은
콘골리움, 트랜스아메리카, 유니언 오일
애트나 생명 등 이었다.
또 의류 업체인 혜인스
멕시칸 음식 체인점 타코벨
그리고
3만 주를 샀던 캐니 메이 등을
발결했다.
콘콜리움은 카펫처럼 부엌 바닥
전체에 깔 수 있는 봉합선이 없는
새로운 비닐 바닥제를 개발했기
때문에 좋아했다.
콘골리움은 바닥재 외에도
조립식 주택에 사용되는 모듈 기술을
활용해 프리깃함을 건조하여
국방부에 납품했다.
콘골리움의 조립식 프리깃함은
전망이 매우 밝은 것을 알려졌다.
타코벨은 맛있는 타코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성장성이 좋았다.
회사 자체도 실적이 좋고
대차대조표가 건전했으며
본사는 이웃집 차고처럼 검소했다.
여기에서 피터린이 7번쩐 원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회사 사무실의 사치스러움과 경영진이
주주들의 이익에 신경 쓰는 정도는
정확히 반비례한다.
즉
사무실이 호화스러운 기업의 경영진은
주주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돌려주려는 의지가 약하다.
(자기만 챙겨 먹으려는 욕심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