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만 준 관리자
한 제조업체의 생산혁신팀에는 오상훈 부장이 있었다.
상훈은 회사 생활을 오래 했다.
윗사람에게는 말을 잘했고, 보고도 깔끔하게 했다.
하지만 실무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업무 방식은 단순했다.
일이 생기면 부하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결과만 받아 임원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원래 관리자라면 팀원들을 지원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역할도 해야 했다.
하지만 상훈은 달랐다.
문제가 생기면 숨어버렸다.
성공하면 맨 앞에 나왔다.
생산혁신팀의 핵심 실무자는 정우진 차장이었다.
우진은 공정 개선 전문가였다.
기계 설비와 생산 라인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늘 우진이 중심이 되었다.
어느 날 회사는 생산 비용을 줄이는 대규모 혁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상훈은 회의실에서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회사의 미래가 걸려 있다."
그리고는 우진에게 두꺼운 서류철을 건넸다.
"이거 해."
그게 전부였다.
방향 설명도 없었다.
지원 계획도 없었다.
예산 확보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일을 넘겼다.
우진은 밤낮없이 일했다.
현장을 돌아다니고 데이터를 분석했다.
설비 업체와 협의하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주말도 반납했다.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결국 프로젝트는 성공했다.
생산 비용이 크게 줄어들었다.
회사는 수십억 원의 비용을 절감했다.
성과 발표회가 열렸다.
임원들과 대표가 참석했다.
상훈은 단상에 올라갔다.
"제가 추진한 프로젝트가 성공했습니다."
"팀원들과 함께 고생했습니다."
겉으로는 팀을 언급했지만 발표 자료에는 자신의 이름만 크게 적혀 있었다.
몇 주 뒤.
성과급이 발표됐다.
상훈은 거액의 특별성과급을 받았다.
우진은 일반 성과급만 받았다.
상훈은 회식 자리에서 말했다.
"내가 방향을 잘 잡아줘서 성공한 거야."
"관리자의 역할이 중요한 거지."
그 말을 들은 우진은 조용히 웃었다.
화를 내지 않았다.
반박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몇 달 후.
회사는 더 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공장 자동화 시스템 구축이었다.
대표가 직접 관심을 갖는 사업이었다.
상훈은 또 우진을 불렀다.
"지난번처럼 잘해."
"알겠습니다."
우진은 평소처럼 대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우진은 자신이 맡은 업무만 정확히 수행했다.
추가로 해오던 일들은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문제가 생기면 다른 부서까지 대신 조정했다.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예산 부족 문제를 직접 해결했다.
이번에는 보고만 했다.
예전에는 상훈이 해야 할 의사결정까지 대신 해주었다.
이번에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모든 업무는 규정대로 처리했다.
프로젝트 중간.
문제가 발생했다.
설비 업체와 계약 조건이 충돌했다.
관리자의 판단이 필요했다.
우진은 메일을 보냈다.
"부장님 검토 부탁드립니다."
상훈은 답하지 못했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며칠 뒤.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다른 부서와 협의가 필요했다.
우진은 다시 메일을 보냈다.
"부장님 권한 사항입니다."
상훈은 회의를 열었지만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프로젝트는 점점 지연되었다.
대표는 의아했다.
"지난 프로젝트는 그렇게 빨리 진행됐는데 왜 이번에는 안 됩니까?"
상훈은 말했다.
"팀원들이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대표는 직접 조사에 들어갔다.
프로젝트 기록을 검토하던 대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과거 프로젝트에서 우진이 작성한 문서가 엄청나게 많았다.
회의록.
계획서.
리스크 분석.
업체 협상 기록.
예산 조정안.
심지어 관리자 판단이 필요한 부분까지 대부분 우진이 초안을 작성해 놓았던 것이다.
대표는 깨달았다.
예전 프로젝트가 성공한 이유는 상훈의 지시 때문이 아니라 우진이 관리자 역할 일부까지 대신 수행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대표는 우진을 불렀다.
"이번에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우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 직무 범위 내 업무는 모두 수행했습니다."
"그 이상은요?"
"관리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달 후.
회사는 조직 개편을 실시했다.
상훈은 다른 부서로 이동했다.
우진은 프로젝트 책임자로 승진했다.
송별회 날.
상훈은 우진에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우진은 조용히 말했다.
"부장님은 일을 나눠준 적은 있습니다."
"그게 문제였나?"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분량을 준 것과 일을 성공시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상훈은 말이 없었다.
우진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성과는 혼자 만든 것이 아니고, 관리자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팀원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날 이후 회사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실제 기여도를 기록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누가 지시했는지뿐 아니라 누가 분석했고, 누가 문제를 해결했고, 누가 실행했는지를 함께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직원들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조직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이 반드시 가장 적게 일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